석미화 (아카이브평화기억 대표, 활동가)

베트남전쟁을 중심으로 한 평화운동은 1999년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에서 ‘베트남전진실위원회’ 활동으로 이어졌는데 활동의 핵심적인 내용은 ‘베트남전쟁 시기에 일어난 한국군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에 대한 것이다. 2015년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가 한국을 직접 방문하며 진상규명 활동은 다시 시작되었고, 2018년 시민평화법정 개최, 2020년 한국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2023년 현재 1심 재판에 대한 판결을 앞두고 있다. 이 운동은 현재 한국 정부의 사과와 성찰을 촉구하는 활동, 베트남 피해자에 대한 추도사업과 지원사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나는 현재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방향 전환을 시도하는 중이다. 그것은 내가 그동안 쌓아왔던 문제의식에 대한 실천이다. 나는 그 방향성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장에서 시도했던 다양한 연구 활동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가능한 것인지는 여전히 물음표다. 지금도 도전과 시행착오 속에 답을 찾아가고 있을 뿐이다. 연구는 활동의 길이 되어 주었고, 활동은 연구를 통해 깊어졌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질문_‘가해의 역사를 성찰한다는 것’에 대하여

출발은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가해의 역사를 성찰한다는 것은 여전히 낯선 경험이다. 문제의식을 던져준 계기는 바로 참전군인의 존재였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을 이야기하는 어느 곳에나 참전군인과의 만남은 피할 수 없었다.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 초기 4~50대 중년이었던 참전군인들은 군복을 입고 물리력을 행사하며 베트남 민간인학살 의혹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고 반대입장을 표해 왔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갈등은 제자리걸음이다. 오히려 골이 더 깊어졌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2015년 응우옌티탄, 응우옌떤런 피해자의 첫 방한 당시 조계사 앞에는 전국의 참전자회와 고엽제전우회 소속 회원들이 몰려와 ‘응우옌떤런은 베트콩이다’는 글자가 써있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했다. 두 명의 베트남 피해자가 부산, 대구 등 전국을 돌며 다닌 자리에도 참전군인은 늘 군복을 입고 나타났다. 2018년 시민평화법정에서도 이런 장면이 연출될까 걱정부터 앞섰다. 시민평화법정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은 ‘온 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문-파월 한국군에 대한 음해의 진실’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행사를 주관하는 단체에 배포하고, 시민평화법정에서 피고 대한민국을 대리하는 변호인단을 방문해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등 적극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시민평화법정이 열리는 날, 다행히 참전군인들은 방청석에서 법정을 지켜봤고 별다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청석에서 이를 지켜보는 그들의 한탄과 호소는 훗날 그들이 설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무거운 마음을 내내 떨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 이후로도 가해의 역사를 성찰하는 다양한 사업을 하는 현장에서 참전군인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참전군인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베트남전 진상규명 활동의 중심에서 누구보다 이런 고민을 안고 운동을 해왔다. ‘한국군’, ‘민간인’, ‘학살’, 이 세 단어의 조합에 대해 매 순간 고민에 빠졌다. 우리는 주장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참전군인을 설득하고 그들이 변화하길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가해’와 ‘피해’의 프레임 속에서 그들과 만날 수 있는 길을 찾기 어려웠다. 우리의 운동을 성찰하고 스스로 길을 찾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과연 무엇을 성찰할 것인가. 지난 활동은 주로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자행한 민간인학살에 초점을 맞춰 왔다. 여전히 이는 미완의 과제다. 동시에 베트남에 참전했던 수많은 군인들은 지금 한국 사회에 같은 공동체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세대이자, 이웃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전쟁 참전의 당사자이며, 가해자 혹은 피해자, 또는 그도 아닌 복잡한 존재다. 가해와 피해라는 프레임이 갖는 일방적이고 단순한 정의는 많은 것들을 함께 바라볼 수 없게 한다는 사실을 운동의 역사는 말해준다. 단순한 이분법적 방정식에서 벗어나 ‘평화’와 ‘삶’의 관점에서 그들을 만나고 진정한 성찰의 근거와 토대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활동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8월 6개월 동안 연인원 32만 명이라는 이들이 전장에 갔다. 현재 70대 중반에서 80대인 참전군인 17만여 명이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따이한에서 다시 철수’가 되어야 했던 그들,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그들 너머 더 많은 이들이 존재함을 인지하고 그들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전군인을 만날 것인가. 그것부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참전군인을 만나는 방법_‘생애사적 구술’

진상규명을 중심으로 한 평화 활동 틈틈이 참전군인을 만나 구술 기록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사업을 기획했다. 예컨대 베트남전쟁에 대한 평화교육 교재개발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평화에 대한 보다 근본적이고 넓은 주제로 확장하여 사업을 만드는 방식이다. 베트남전쟁은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겪은 전쟁이고, 전쟁의 당사자가 우리와 가깝게 살아가는 이들이며, 단순하게 정의될 수 없는 복잡한 지형 때문에 우리의 위치를 낯설게 보도록 만들어준다. 그 안에 참전군인의 이야기도 포함된다. 그들을 알기 위해 ‘구술’이란 방식을 선택해 만나고, ‘사건’ 중심의 접근이 아닌 ‘삶’ 전반과 ‘전쟁’의 관계를 탐구한다. 소위 ‘생애사적 구술’이란 방식으로 참전군인의 이야기를 길게 듣는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를 발굴하고 그것을 평화콘텐츠로 제작해 시민들에게 선보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참전군인이 직접 시민과 만나서 나눌 수 있도록 공론장을 기획하고 전쟁 세대와 전후세대가 평화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갔다. 그것은 상당히 효과적인 평화교육 방법이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직접 이야기하는 평화의 소중함은 무게가 다르다. 나는 이것이 가능한 평화 활동의 한 방법이라는 것을 <참전군인의 평화활동에 대한 연구>(아래 ‘연구1’에서 소개)를 하며 확인한 바 있다.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나라, 미국에는 수많은 참전군인 ‘베테랑’들이 있다. 그리고 미국에는 그들이 중심이 되어 평화 활동을 하는 참전군인 단체가 여럿 있다. 그중 하나인 ‘평화재향군인회(Veterans For Peace)는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쟁 등에 참전한 군인과 제대군인 등으로 구성된 비영리단체이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향하며 군사적 위협을 대체하는 새로운 대안을 찾아 홍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미국 정부가 다른 국가에 개입하는 것을 감시하고, 참전군인과 전쟁 희생자에 대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주요 활동 목표이다. 그들은 한국의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반대 활동과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 활동에 연대하는 등 전세계 미국의 군국주의와 전쟁 반대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 그들의 활동 선언문은 “우리는 군국주의와 전쟁의 진정한 비용 및 결과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고, 평화적이고 효과적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참전군인으로서 얻은 개인적인 경험과 관점을 활용한다.”고 적고 있으며, 전쟁 반대, 전쟁을 미화하는 모든 사회적 문화에 저항하는 활동, 그리고 평화교육 활동을 펼치고 있다.

나는 미국 참전군인의 평화 활동과 평화교육 사례가 우리에게도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사회적 경험과 여러 가지 조건이 많이 다르지만 한국 사회에도 평화를 사랑하는 참전군인이 존재하며 그들이 평화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알려나간다면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기대한다.

미국 참전군인이자 평화활동가인 테드 앵글만(Ted Engelmann). 그는 베트남전 참전군인이고, 그의 아버지 또한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이다. 나는 그에게 내가 추진 중인 연구 <월남으로 간 동창생들>(아래 ‘연구2’에서 소개)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고, 그는 내가 하는 활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Once the vets begin to appreciate the situation, that they sacrificed their lives as mercenaries in VN so Park Chun Hee could make money for the country (there could be resentment as a result…now they’re proud), they might be willing to help you, and you help them, find a way to making efforts towards peace, whatever that looks like. In my mind, that’s a big cultural shift, and not easy. A long-term goal. However, from my perspective, I feel it’s worthy.”

일단 퇴역군인들이 박정희가 나라를 위해 돈을 벌기 위해 베트남에서 용병으로서 목숨을 바쳤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하면(결과적으로 분개할 수도 있고… 이제 그들은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다), 그들은 기꺼이 당신을 도울 것이고, 당신은 그들이 평화를 위해 노력할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어떤 모습이든 간에. 내 생각에 그것은 큰 문화적 변화이고, 쉽지 않은 일이다. 장기적인 목표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내 관점에서, 나는 그것이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