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규 (민주시민교육원 나락한알 원장)

글들을 잘 읽어보았습니다. 현장의 고민과 좌절 그리고 기대 등을 읽을 수 있었고, 글을 통해 함께 고민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저는 이 글로 그 고민의 기쁨을 공유하려고 합니다. 기쁨이라 표현했지만, 어쩌면 제 고민으로 인해 여러분과 주최 측이 불쾌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악의적인 것은 아니나, 불쾌하기를 바라는 기대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쾌함이 불화로 이어지기보다, 새로운 화해를 위한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제 의도라면 의도입니다. 저 역시 그런 자세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의도치 않게 글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긴 글로 인한 불쾌는 의도된 것이 아니니, 널리 용서를 구합니다.

I.<현장에 관한>

질문들

  1. 발표문이 말하는 현장은 누구의 현장인가? 자본가의 현장도 있고, 행정가의 현장도 있으며, 일상인의 현장도 있는데, 왜 하필 투사의 현장만 거론되는 것일까?
  2. 현장과 비현장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이고? 이를 나눈 주체는 누구(또는 무엇)인가?

대답들

발표문들에서 현장을 이야기할 때의 증상이 보인다. 그리고 현장을 이렇게 이야기하도록 만드는 현장 아닌 것의 폭력도 느껴진다. 그렇다면 현장을 생산하는 현장 아닌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두 가지 비현장과 이 둘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한 가지 메타-비현장을 떠올린다. 하나는 자본의 체계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행정) 체계다. 그리고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메타비현장은 옥시덴탈 가부장(백인∧성인∧남성∧비장애……)이라는 신화 체계다. 이 세 구조의 공모를 통해 온갖 폭력들이 현장을 만들어낸다.

나는 여기서 ‘취약성(vulnerability)’이라는 개념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 취약성이 비현장의 구조적 폭력을 적나라하게 폭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투사는 이 폭로의 주체이자, 구조 변혁의 주체다.(사실 나는 내 편견 때문인지, 말이 주는 강박 때문인지, ‘투사’라는 말을 쓰기가 너무 꺼려진다. 오히려 활동-연구가라는 말이 더 좋다. 이 글에서 ‘투사’는 대부분 그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취약성은 (이성+감성+감각적 역량을 가진) 인간만이 아닌 몸을 가진 모든 존재들의 술어다. 활동과 연구를 결합시킨 투사가 시민사회의 공적 기반을 확장하고 정화하는 존재라면, 그래서 저 세 구조가 생산한 취약성을 해결하는 존재라면, 운동과 지식이 결합하는 물리적-사회적 토대가 현장이다. 현장과 취약성은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투사는 구원자이거나 메시아다. 배제와 박탈의 폭력이 충층화되어 (극도의) 취약성을 보인 존재들(부재 처리되거나, 오염요소로 처리된 존재들)과 만나는(연대가 아니다) 곳이 현장이다.(나는 여기서 서발턴 또는 서발터니티를 생각한다.)

현장을 취약성을 생산하는 현장과 취약성을 해결하려는 현장으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활동가가 거주하는 영역은 이 두 현장에 걸쳐 있다. 활동가는 취약성을 생산하는 구조의 문제를 간파하고, 취약한 인간과, 취약한 사회 또는 집단, 그리고 취약한 모든 존재의 문제 해결을 위해 새로운 지식-권력(활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장 활동가는 처음부터 연구-활동의 문제와도 뗄 수 없다. 연구와 활동을 도대체 누가(무엇이) 나눈 것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활동가가 그 나눔의 주체는 아니라는 점이다. 한 가지 더 확실한 것은 활동가가 굳이 그런 나눔의 기준을 따를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II. <투사에 관한>

질문들

  1. 그렇다면 누가 투사인가? 누가 투사가 될 수 있는가?
  2. 구조를 바꾸는 주체, 새로운 구조를 만드는 주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주체는 결국 주체 중심주의의 원환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주체가 발표문처럼 다른 사람이 되는 기적을 수행할까?

대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