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 #연구자, #활동가, #공익활동, #지식생태계
새로운 버전의 원고를 초조하게 시작한다. 거의 완성된 초고를 버렸다. 현재의 시점에서 글을 쓰다 보니 그간의 문제의식이 다 숨어든다. #시민사회 #지식생태계, #연구활동가를 주요 키워드로 내게 발표를 부탁한 것은 결국 마땅한 사람을 못 찾아서이지만, 자/타칭 현장연구자로 활동하는 나의 고민이나 성찰을 듣고 싶었던 것일 테다. 내가 무엇을 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고민을 했는지가 좀 드러나는 글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선 ‘관광학’으로밖에 이해받지 못하는 학위프로그램에서 박사를 한 탓에 나는 얼마간 관광학계 언저리에 있었다. **도, **도 등을 다니며 겪은 뱃멀미의 고통, 연구의 중간결론을 못마땅해하던 섬 이장의 배를 타고 뭍으로 나오면서 엄습했던 공포는 내가 어떤 연구자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던 두려움의 무게보다 어찌 보면 가벼웠을 것이다. 나는 내가 놀던 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2017년 4월, 들파의 첫 모임을 했다. 그땐 그냥 시민사회 현장연구자 모임이었고, 들고파다(‘들파’)는 나중에 붙인 이름이다. 줄임말이지만, 우린 들파의 ‘들’은 ‘민중, ‘시민’, ‘파’는 ‘근원적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자 했다. 막연한 기대는 있었으나 실제로 성사된 건 정란아, 이강준 선생에 힘입은 덕이다. 그날 모였던 10명 남짓의 사람 중에 연구를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지만 저마다의 처지에서 ‘시민사회 현장연구자 모임’이 필요하다 했다.
임의단체로 등록했다. 들파는 “회원들의 실천과 연구를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민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들파 회칙, 제3조 목적). 우리는 들파의 세부 목표를 ▲현장 기반 시민사회 연구 ▲시민사회 현장연구자들의 소통과 교류 ▲차세대 현장연구자 발굴 및 지원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학습 지원 ▲학문분야와 실천 영역을 넘어서 협력으로 정했다.
2020년 코로나가 있기 전까지 우리는 월 1회 정기모임을 가졌다. 모임의 취지에 동의하는 회원들도 22명까지 늘었다. 독서토론, 연구워크샵, 초청강의도 있었지만, 우리는 술자리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간혹 공동연구를 통해 연구자로서의 모습을 확인했다. 코로나 이후 공식 모임은 중단됐고 개별 모임이 간간이 있었다.
2016년부터 경희대 공공대학원에서 강의를 시작해 지금도 하고 있다. 초기엔 시민사회와 사회적경제, NGO현장문제워크샵 등도 담당했지만, 지금은 5년째 논문연구설계, 논문연구방법론을 강의하고 있다. 비정규직 교수의 비애에 대해 나까지 말을 보탤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하느냐. 두 가지이다. 하나는, 어디 가서 소속을 얘기하기 좋다. 내가 아무리 자부심이 있어도 ‘들고파다’ 대표란 걸 꺼내기 어려울 때도 있다. 양가 연로하신 부모님에게, 그리고 정부의 자문회의에서, 프로젝트 낼 때, 겸임교수 타이틀이 훨씬 쉽고, 유용하다. 다른 하나, 학교 아이디로 페이퍼를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게 없다면 정말 난감할 것 같다. 물론, 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시간 그 자체는 너무 귀중하다. 소속되지 않은 연구자들이 어디 가서 내밀 수 있는 타이틀, 논문접근권 등도 함께 고민해 볼 문제다.
사실, 내가 활동했던 단체로 복귀하는 것을 잠시 고려한 적도 있었다. 환경정의는 내가 활동가로 일했던 곳이고, 여기에는 ‘환경정의 연구소’가 부설로 있다. 2017년 전후에 먹거리정의센터 회원들과 마을부엌연구 시즌1, 시즌2를 진행했다. 회원들은 ‘시민연구자’란 타이틀을 소중히 여겼고, 열심히 연구했다. 개념 정의도, 모집단도 없는 ‘마을부엌(community kitchen)’이라는 실체를 확인하고자 1년을 꼬박 길거리에서 보냈다. 함께 정말 많은 토론을 했다. 우린, 현장의 실체에 기반해 ‘마을부엌’을 정의하고, 유형을 분류할 수 있었다. 정말 grounded theory가 이렇게 만들어질 수 있구나를 느꼈지만, 더는 할 수 없었다. 단체에서 연구는 늘 후순위였고, 연구는 단체활동의 자원을 만드는 수단이었다. 보고서 독박, ‘활동가출신 박사’에 대한 부당한 처사도 생각을 접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