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한별 (청계천 연구자, 서울대학교 아시아도시사회센터)
‘현장연구자’라는 말은 이중적이다. 여러 측면에서 그러한데, 우선 그 의미가 직설적이기도 해서 누구든 얼마지 않아 직관적으로 알아듣지만, 또 그 순간 바로 ‘엄밀한 의미에서 누구?’라는 질문이 (스스로) 되돌아온다. 자기 자신의 일부라도 해당한다면 가장 무거운 말일 수도 있다. ‘현장연구’와 ‘현장연구자’라는 두 표현에서 ‘현장’의 의미가 사뭇 다른 것처럼 그 말의 뉘앙스는 표현상의 한 글자 차이를 넘어선다.
다른 한 측면. 현장연구자는 연구의 내용 측면에서 현장과 ‘함께 살기’가 가능하지만, 직업적으로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거리가 멀다. 직업적 정체성으로 현장(활동)과 연구를 빈번히 왔다갔다 하기란 매번 긴장하며 넘나들어야 하는, 위태위태한 협곡 위의 구름다리 건너기 같은 것이다. 현장연구자는 현장의 활동가로 인식되기도, 명실상부한 “학계”의 연구자가 되기도 쉽지 않다. 연구에 집중하게 하자라는 스승의 아끼는 마음의 발로이긴 하지만, 필자가 박사과정에 입학했을 때 지도교수는 별로 하지도 않는 내게 모든 현장 활동을 ‘끊으라’ 했었다.
또 다른 측면. 그의 연구 ‘성과물’은 이중적인 양극단 속에서 그냥 ‘사라질’ 수 있다. 문제의식과 언어가 다른 그의 연구 성과는 관행적인 학계에는 낯선 것, 아무도 찾아보지 않는 연구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연구가 현장에 어떤 도움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후자가 현장연구자에게 더 두려운 것일 테지만. 그리고 현장은 대개 변화를 염원하는 연구자의 바람과 무관하게 ‘진(행된)다’. 물론,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 존경스러운 현장연구자는 분명히 있다.
부끄러운 개인적 경험을 빌어 꺼낼 이야기지만, 깊다면 깊은 연구와 현장 사이의 이 골짜기란 어쩌면 원래는 없어야 하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이 깊게 팬 양안의 낭떠러지가 아니라 단단히 축적된 무엇인가가 채우고 있는 자리라면, 그곳을 채우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현장에 필요한 지식’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또 그것을 지식과 학문의 ‘현장성’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하는 학문이 아닌, 어떤 다른 세계, 다른 영역의 학문은 현장성이나 현장에 필요한 지식이 넘치게 생산되는 곳도 있을 것 같다. 아무튼, 그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다면 많은 동료의 삶이 훨씬 나을 것 같다.
위에서는 부끄럽다 말을 꺼냈지만, 실은 요즘 필자는 ‘부끄러워하지 말자’라고 스스로 되뇌고 있다. 현장과 ‘거리두기’ 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연구의 대상, 현장에 처음 갔던 때가 2001년이었다. 학부 졸업하고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시민단체의 회원과 자원활동가 사이의 애매한 무엇 정도로, 생태하천으로 복원한다는 청계천 주변의 상인들을 만났다. 상황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틀과 언어가 필요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의 답답함은 현장연구의 ‘방법론’ 같은 것을 몰라서였던 듯하다. 같이 한 선생님들과 세미나를 꽤 했지만 찾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 생각해 활동가보다는 기록자를 택했다. 영상기록은 나중에 내게 지식이 생길 때 다시 들여다보기 위해서라도 찾은 궁여지책의 현장 보존 방법이었다.
학교로 다시 가서 박사과정의 논문 연구를 시작할 때, 애초 기대했던 현장의 문제를 해결할, 아니 문제를 정의할 지식을 얻지 못한 것에 꽤 좌절했다. 대학원 과정이 그럴 지식을 제공하지 못한 것이라고 당시는 스스로 핑계를 댔지만, 멍청하게도 내가 공부를 잘못한 때문일 수 있다. 10년이 지나 잠잠해진 청계천에 다시 갔고 10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아이디어로 대략 논문을 마쳤다. 이후 연구를 위해 청계천에 세 번째로 다시 간 것은 2019년이었다. 처음 현장에 갔던 때의 청계천 복개 문제는 주변의 재개발 문제로 본격화되었던 상황이었다. 현장에 반갑게 찾아가 만난 이해관계자는 20여 년 전처럼 여전히 자신의 상황과 모순에 대해 무감했고 필자의 연구나 주장은 이미 늦어버린 가정일 뿐 문제해결에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다. 공공기관은 ‘조사와 기록’을 위한 연구만을 주문했다. 결국 ‘연구’를 위한 연구만 하고 다시 ‘나온’ 셈이다.
언급했던 현장과 거리두기는 20년 동안 이어진 경험의 선택이다. 청계천은 필자의 연구에서 ‘도심제조업’이 밀집한 공간인데, 2019년 관련한 국제포럼을 조직하고 초청했던 뉴욕의 전미(全美)도심제조업협회장을 만났을 때 그는, 미국 전역의 도심제조업 사업장과 지역조직을 돌며 각고의 노력으로 설득한 끝에 그 협회를 10년 만에 조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애초 그는 잠시 관련 소송을 맡았던 전도유망한 변호사였을 뿐이었는데…, 지난 10년의 활동으로 이제 겨우 약간의 사회적 존재감을 표할 수 있는 정도라고 조용하게 이야기하는 그의 음성이 단단하긴 했지만 무척 고단하게도 들렸다. 그리고 그의 말은 곧 현장에 ‘속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구름다리를 다시 건너가라. 그리고 현장을 재구축하라. 직접 이해관계자가 되어라.
연구자가 아닌 현장활동가들, 그리고 연구자 중에서 현장 지향인 동료들, 운동가들과 가까운 연구조직에 속해 있는 것은 큰 행운이다. 그들과 연계할 때 다양한 현장의 모습을 전해 듣고 볼 수 있다. 갈등과 불평등이 첨예한 현장에서 어렵게 활동하는 현장연구자의 이야기는 진실되게 접근하려는 그의 자기 수양적 태도를 중심축으로 옹호자로서의 정체성과 공평무사한 연구자 사이를 오가는 섬세한 균형잡기의 어려움과 현장연구의 희망을 함께 전한다. 그런데, 그 ‘균형잡기’의 정체가 실은 허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미국의 도심제조업협회회장의 말끝에 걸린다. 균형잡기가 현장연구의 방법론을, 현장에 도움이 되는 연구의 정체를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해관계자가 선 자리에서 연구자의 시선이 파악하는 세상과 방향은 객관적이거나 학문적으로 엄밀한 것이 아닌가?
현장에서 연구자의 ‘중립’이란 실은 허구이다. 연구자는 문제를 보고 현장에 왔던 것이고 문제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그는 이미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진 중심축을 세우고 있다는 전제이다. 절대적인 무관(disinterestedness)은 없다. 그렇다면 ‘연구’의 관점에서 현장연구자와 현장연구 방법론에 대한 탐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현장에 있는 이해관계자의 입장에서 학문이 수행하는 ‘연구’를 다시 정의하는 것. 그것이 연구와 현장 사이의 협곡을 메우는 방안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학문이 하는 지식생산, 즉 연구의 역할은 무엇일까? 돌이켜보면 필자의 대학원 과정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닌 듯하다. 그것은 연구자를 혼자 고립되어 수행하는 개인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언어’-여전히 서툴지만, 필자가 처음 청계천에 갔을 때 필요했던 그것-를 약간은 가진 주체로 만들 수 있는 듯하다. 현장과 그 밖의 다른 세계를 연결할 수 있는 끈이나 신호 같은 것 말이다.
투사적 연구(Militant research)를 소개하는 한 자료는 연구자의 현장연구 수행을 ‘관찰적 참여(observational participation)’로 소개하고 있다. 어쩌면 두꺼운 이론적 논의가 이 개념에 달려있을 수 있지만, 그 소개 대신 필자 나름의 의미로 전유하고자 한다. 신화에서 시력을 잃은 오리온은 케달리온을 어깨에 올리고 길을 찾는다. 구글이 웹에 인용하면서 “거인의 어깨에 기대어 더 넓은 세상을 보라”는 격언으로 바뀐 이 장면은 노벨상 수상자 발표 때 가끔 인용된다고 하는데, 거인은 선대 학자들에 의해 축적된 지식 공통체를, 그것을 딛고 올라선 케달리온은 연구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되곤 한다. 필자 생각에 현장연구자는 현장이라는 거인과 함께 서서 더 넓게 보이는 시야, 즉 세상과의 연결을 고민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관찰적 참여’의 ‘관찰’은 더 넓은 시야를 가져올 수 있는, 연결, 연계, 고립되지 않을 노력, 소통 등등을 모두 포함하는 ‘함께’ 연구하기라는 공통 작업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