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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개념들의 시대, 비판적 현장연구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한상원 _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진보’의 초라함에 관하여

올해 초 <한겨레>에 실린 칼럼의 제목을 흥미롭게 본 기억이 있다. 런던정경대 사회정책학과 교수인 티모 플렉켄슈타인의 칼림이었는데, 그 제목은 ‘압박에 직면한 사회 계약과 좌파의 과제’였다. 현 시기 민주주의의 위기를 ‘사회 계약의 위기’로 진단하는 관점도 흥미로웠지만, 언론사 칼럼의 제목에서 학자가 대놓고 ‘좌파의 과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더 눈길이 갔다. 사실 이 글의 내용 자체는 대단히 급진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고, 영국과 한국에서 각각 집권하고 있는 보수 정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정도였다. 오히려 더 인상적인 것은, 자신이 이념적으로 ‘좌파’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영국의 자유로운 정치풍토에 있다. 우리의 경우는 특히 학자나 연구자들에게 형식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거나, 적어도 특정 정치이념 중 하나를 편드는 행위가 편향적이라는 무언의 압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많은 사람들은 진보라는 용어를 통해 자신의 색채를 드러내곤 한다. 진보정치, 진보적 실천, 진보적 연구 등 ‘진보’라는 말은 보수정치의 대항개념으로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서 드러나는 함정은, 오늘날 진보라는 기표는 이미 거대정당 체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민주당에 빼앗긴 개념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일반적인 시민들의 인식에서도, 언론보도에서도 ‘진보’ 내지는 ‘진보적’이라는 수식어는 대개 민주당 계열의 정치세력과 지지자들을 일컫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광화문에서 대립하는 태극기 시위가 ‘보수 시위’로 불리고, 친민주당 성향의 반정부 시위가 ‘진보 시위’로 불리면서, 마치 이 두 시위가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도되기도 한다. 민주당이 실제로 진보적인 정책을 만들고 진보적 의제들을 부분적이라도 실행해왔다면 모르겠지만, 하다못해 장애인들의 시위에 대해 지지논평이라도 냈다면 모를까, 현재 어떤 의미에서도 진보적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민주당이 진보를 참칭하고 그것이 대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현상은 한국 정치이념의 왜곡을 낳고 있다. 왜냐하면 조국 사태, 박원순 사태, 대장동 사태 등의 민주당발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그것이 이전 집권세력의 부패가 아니라, ‘진보’의 위선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학계마저 이러한 현상들을 마주했을 때, 같은 편인 ‘진보’를 지키겠다면서 발 벗고 나서서 정치인들의 개인 비리를 ‘보수 언론의 가짜뉴스’라는 식으로 덮으려 하고 눈 감아 줘야 한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좌파를 대체하는 진보의 기표가 빼앗겨버린 이후, 진보는 이제 사회적 약자의 저항이 아니라, 부패나 성추행 의혹을 받는 거대정당 정치인을 편들어주는 방탄의 논리로 전락해버렸다.

빼앗긴 개념들에 관하여

그 외에도 우리는 많은 개념들을 정치권에 빼앗겨버렸다. 대표적인 개념은 반지성주의다. 미국의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미국의 반지성주의』라는 책을 통해 냉전 시기 메커시즘의 광풍을 비판하면서 사용해 유명해진 이 개념은 전 세계적으로 뉴미디어의 발전과 함께 출현한 탈진실 정치의 흐름 속에서 다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식에서 정치적 반대파들을 겨냥해 이 개념을 사용했다. 그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의 적이라고도 말했다. 포퓰리즘 정치의 대두가 민주주의의 위협이 되고 있다는 진단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라임이라도 맞춘 듯, 문재인 전 대통령은 양산 사재 앞에서 큰 소리로 시위를 하고 주민들과 마찰을 빚기까지 하는 태극기 부대 시위대를 향해 ‘반지성’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는 게시물을 트위터에 작성한다. 여야를 대표하는 전현직 대통령이 서로의 지지자들을 반지성주의 개념에 기대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지성적 논의나 그것을 대표한다고 알려진 계층에 대한 적대감을 특징으로 하는 반지성주의는 오늘날 정치적 공론장의 축소, 개인들의 공적 관심 결여, 나아가 개인들이 비판적이고 지성적 담론에 다가가기 어려운 현실을 반영한다. 뉴미디어에 등장하는 왜곡된 진실과 이를 통한 혐오 담론의 번성 등에서 보듯 한국 사회에 반지성주의는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지성적 삶이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개인들을 냉혹한 생존경쟁으로 내몰았던 현 정권과 이전 정권은 모두 한국 사회의 반지성주의에 책임이 있다. 빼앗긴 개념은 이처럼 엉뚱한 맥락에서, 상호 대립하는 정치진영이 서로를 비난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식어로 전락해버린다.

자유, 공정, 법치도 마찬가지다. 이런 개념들은 오늘날 사회적 약자를 공격하고, 그들에 대한 혐오정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다. 약자에 대한 지원은 시장의 자유를 왜곡하고,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특혜를 베풀기 때문에 불공정한 것이며,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약자들의 저항은 법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자유, 공정, 법치는 가진 자들을 위한, 기업과 다주택 보유자와 고소득자를 위한 자유, 공정, 법치가 되었다. 마치 칼 맑스가 자유와 평등이 결국 부르주아의 권리라고 비웃었던 19세기로 회귀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눈을 돌릴 때

이제는 우리의 눈을 돌릴 때다. 다양한 사회적 현상들이 벌어지는 현장에 대한 연구는 이렇게 학술적 개념들이 정치세력들에 의해 빼앗겨버린 현주소를 타개할 하나의 방안이 아닐까. 사회 구석구석을 조명하며, 모두가 모두와 어떻게 연결되어 살아가고 그들의 삶이 어떻게 사회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밝혀내는 비판적 현장연구가, 가진 자들을 위한 자유, 공정, 법치의 세계관에 맞서는 또 하나의 비판적 리얼리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특히 한국 사회는 불안정 노동, 소수자 인권, 산업재해나 사회적 재난 등의 현상들이 가장 중요한 이슈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결국 ‘누구를 위한 자유, 공정, 법치인가’ 하는 문제가 현실에서 입증될 때, 그러한 빼앗긴 개념들은 다시 사회적, 정치적인 잠재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필자는 지난 3년간 참여사회연구소가 주최하는 ‘반짝반짝 논문 공모전’을 진행하면서 그러한 현장연구의 결과들을 마주했다. 지난 3년간 참여사회연구소가 시상한 논문 주제들은 아래와 같다. 이 연구들은 한국 사회의 소름끼치는 냉기와 어둠 속에서도 시대를 비춰주는 빛과 같은 성과들이다. 이런 연구가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기대를 품은 채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반짝★반짝 논문상] 수상자

2022